이런 여성, 이런 나라, 이런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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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기봉 전문위원
  • 승인 2018.08.03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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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6월 21일 딸을 낳은 후 사실혼 관계인 ‘파트너’와 함께 찍은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6월 21일 딸을 낳은 후 사실혼 관계인 ‘파트너’와 함께 찍은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녀가 2일 6주간의 출산휴가에서 돌아왔다. 업무에 복귀하면서 아이 아빠와 함께 갓난아이를 안고 집에서 찍은 사진을 국민에게 공개했다. 다음 달 유엔총회에 이 두 사람을 대동하겠다고도 밝혔다. 38세의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 이야기다. 그녀는 6월 21일 첫 딸을 낳았다. 하지만 그녀는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았다. 아이 아빠와는 사실혼 관계다. 언론에서 ‘파트너’라고 표현하는 아이 아빠는 방송의 낚시 프로그램 진행자다. 

국가 정상이 재임 중 출산한 사례는 1990년 당시 37세였던 베나지르 부토(1953~2007) 파키스탄 총리 이후 28년 만이다. 부토 총리는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은 후 다음날 바로 업무에 복귀했다. 여성에게 차별적인 이슬람 정치문화 탓이었다. 

아던 총리는 정확히 28년 후 당당하게 그것도 6주간이나 출산 휴가를 떠났다. 세계 최초로 임기 중 자리를 비우고 출산휴가를 떠난 국가수반이 됐다.

지난해 10월 취임한 아던 총리는 이 나라 역사상 최연소 총리이자 세 번째 여성 총리다. 현직 여성 수반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어리다. 인구 450만 명의 뉴질랜드는 1893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나라다. 의회 정치의 본산인 영국은 1928년, 시민혁명의 나라 프랑스는 1946년에 여성참정권을 부여했다.

아던 총리는 올해 1월 인스타그램에 임신 사실을 공개하고 출산 직전까지 만삭의 몸으로 총리직을 수행했다. 출산하러 갈 때는 아무런 특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총리 전용 의전차량을 이용하지 않고 파트너가 운전하는 개인 승용차로 특별한 병원이 아닌 일반 공공병원으로 가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안은 사진을 SNS에 직접 올리고는 “부모들이 겪는 모든 감정을 우리도 겪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동안 국민의 응원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출산을 도와준 조산원과 함께 찍은 사진도 공개하며 감사를 표했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지난 1월 임신 사실을 밝히면서 인스타그램에 올린 이미지. 큰 낚싯바늘이 작은 낚싯바늘을 뱃속의 아이처럼 품고 있다. 그녀의 파트너는 낚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송인이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지난 1월 임신 사실을 밝히면서 인스타그램에 올린 이미지. 큰 낚싯바늘이 작은 낚싯바늘을 뱃속의 아이처럼 품고 있다. 그녀의 파트너는 낚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송인이다.

그녀는 약속한 대로 바로 출산휴가를 떠났다. 이 기간엔 부총리가 총리 대행을 맡았다. 아던 총리가 국정에 복귀한 후에는 그녀의 파트너가 전업아빠가 될 예정이라고 한다. 뉴질랜드의 출산휴가는 법적으로는 22주가 보장돼 있는데 나머지는 파트너가 대신 쓰면서 육아를 한다는 것이다.

1999년부터 10년간 뉴질랜드를 이끌었던 여성총리 헬렌 클라크는 한 언론기고문에 “저신다 아던은 여성에게 닫힌 문이 없음을 보여줬다. 여성이 중요한 일을 하면서 엄마가 될 수 있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남성도 집에서 육아에 전념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21세기 성평등의 역할 모델이다”고 말했다. 아던의 정치적 멘토인 클라크 전 총리는 결혼은 했지만 정치에 충실하기 위해 자녀를 갖지 않았다.

총리가 애를 낳자 뉴질랜드는 축제 분위기였다. 그녀가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부터 태어날 아기에게 선물하겠다면서 뜨개질 열풍이 불었다. 아동용품을 뜨개질해서 기부하자는 ‘니트포저신다(#knitforjacinda)’ 운동도 벌어졌다. 뉴질랜드 헤럴드 신문은 전면과 후면을 털어 아기 탄생을 축하했고, 베이 오브 플렌티 타임스는 ‘딸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한 칼럼니스트는 모든 뉴질랜드 국민이 이 아기의 대부대모라고 했다. 그는 “전 국민이 한계를 뛰어넘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을 감사해야 한다.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현직 국가수반이 자연스럽게 출산할 수 있는 국가적 환경을 국민 모두가 만들었다”고 감격했다. 

아던 총리는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출연한 TV 토론회에서 “육아와 경력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그런 질문은 전혀 수용할 수 없다. 언제 아기를 갖느냐는 전적으로 여성의 선택이고, 그것이 여성에게 일자리를 주는 데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뉴질랜드 국민은 배가 불쑥 나온 임부복을 입은 총리를 한동안 봐왔다 

트레버 맬러드 뉴질랜드 국회의장은 지난해 11월 8일 생후 3개월 된 동료 의원의 딸을 안고 본회의를 진행했다. 의회를 가정친화적으로 만들겠다는 약속이다. (사진=뉴질랜드 의회TV 캡처)
트레버 맬러드 뉴질랜드 국회의장은 지난해 11월 8일 생후 3개월 된 동료 의원의 딸을 안고 본회의를 진행했다. 의회를 가정친화적으로 만들겠다는 약속이다. (사진=뉴질랜드 의회TV 캡처)

이 나라에서는 지난해 11월 남성인 트레버 맬러드 국회의장이 의장석에서 아기를 품에 안은 채 어르면서 회의를 진행했다. 3개월 된 동료 의원의 아이다. 국회를 가족친화적인 분위기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일부 여성 의원들도 젖먹이 아기를 데리고 출석해 모유 수유를 했다. 이날 뉴질랜드 국회는 여성 의원이 젖먹이 아기를 데리고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꿨다. 뉴질랜드는 국회의원 120명 가운데 여성이 46명이다. 그 며칠 뒤 공교롭게도 일본에서는 한 여성 시의원이 갓난아기를 안고 시의회에 참석했다가 다른 의원들의 퇴장 요구를 받자 아이를 다른 사람에 맡겼다는 뉴스가 나왔다.

아던 총리에 앞서 8년간 이 나라를 이끈 지도자는 존 키 총리였다. 그는 2016년 말 전격적으로 총리직 사임을 발표해 국민을 놀라게 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의 많은 희생이 있었기에 총리직 수행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었지만 그동안 아내를 너무 외롭게 했다. 두 아이들은 사생활 침해에 시달렸다. 이제는 가정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55세의 인기 있던 정치지도자였다. 다음 총선에서 3연임도 유력한 상황이었다.

다른 나라의 경우를 찾아봤다. 가정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성 정치 지도자, 현직에 있을 때도 당당하게 임신하고 출산한 여성 정치인의 경우다. 

폴 라이언 미국 하원의장은 지난 4월 임기가 끝나는 내년 1월에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선언해 미국 정치판을 흔들었다. 48세에 10선 의원인 그는 대통령 부통령에 이어 미국 정치 서열 3위이자 공화당의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도 거론됐던 인물이다. 그는 “남편과 아버지로서 가정에 충실하고 싶다. 10대인 세 아이들에게 ‘주말 아빠’가 아닌 ‘풀타임 아빠’가 되고 싶다.”고 은퇴 이유를 말했다.  

2008년 스페인의 첫 여성 국방장관이 된 카르멘 차콘(2017년 46세로 사망)은 임신 7개월이었다. 군 경력이 전무한 그녀가 임신복을 입고 군을 사열하는 사진은 문민지배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그녀는 장관 재임 중 출산했다. 라시다 다티 프랑스 전 법무장관은 2009년 재임 시 42세 미혼으로 출산했다. 그녀는 부른 배를 안고 아무렇지 않게 국정을 수행했다.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때 이혼한 사르코지 대통령과의 염문설도 나돌았다. 프랑스 국민은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캐머런 영국 총리는 2010년 아내가 넷째 아이를 낳자 출산휴가를 2주 동안 사용했다. 페이스북 최고경영자인 마크 저커버그는 첫 딸을 낳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난해 둘째 딸을 출산 때도 2개월 동안 육아휴직을 썼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7 일·가정 양립 지표’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육아휴직제 도입률은 59%다. 육아휴직 사용자 중 남성 비중은 8.5%다. ‘라테 파파’(커피를 든 채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는 남자)라는 말을 만들어낸 스웨덴은 32%, 독일 노르웨이 등은 20%다. 노르웨이는 육아휴직을 최장 54주 동안 주면서 이 중 6주는 아빠만 사용하게 한다. 여성의 독박육아를 법으로 금지한 것이다. 

우리나라 혼외자녀 출생률은 1.9%다. OECD국가 중 현저하게 가장 아래다. 프랑스(56.7%)나 노르웨이(55.2%), 스웨덴 (54.6%), 영국(47.6%)에는 비교가 되지 않고, OECD평균(39.9%)에도 한참 못 미친다. 사생아라는 말이 남아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비혼 임신의 96%가 낙태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태어나도 70%가 입양된다. 올해 우리나라 연간 합계출산율은 1.0도 위태롭다. 아마존닷컴을 세운 제프 베조스는 미혼모의 아들이다. 18세 생부는 그를 버렸지만 16세 여고생 엄마가 그를 키웠다. 애플왕국을 만든 고 스티브 잡스나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도 미혼모의 자식이었다. 

나는 이런 장면이 보고 싶다. 여성의원이 만삭의 배로, 또는 아이를 안고 국회에 나와 토론하고 수유하고, 법적으로 미혼인 여성 장관이 아이를 낳아도 국민이 축하하고, 대선주자 급에 가까운 정치인이 어느 날 가족을 외롭지 않게 하겠다며 돌연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젊은 대기업 CEO가 한 달간 출산휴가를 떠나는 장면. 그리고 무엇보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국민의 시선. 언제 그런 장면을 볼 수 있을까.

한기봉 칼럼니스트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문화체육관광부 홍보기획관,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역임

<편집자주: 외부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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