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멋지게 이별하기
봄, 멋지게 이별하기
  • 한기봉 전문위원
  • 승인 2018.05.2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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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봄날은 간다'의 한 장면
영화 '봄날은 간다'의 한 장면

그 영화를 처음 본 게 벌써 17년 전이다. 재개봉을 한다 해서 얼른 달려가 혼자 조용히 보고 왔다. 역시 먹먹했다. 그리고 그날 밤 친구들을 불러 술 마시고 노래방에 갔다. 미리 선언했다. 이 노래는 죽어도 양보 못 한다고, 3절까지 알뜰살뜰 부르겠다고. 그러나 부른 게 아니다. 불러 젖혔다. 거나하게 뽑아댔다.

1954년 작사가 손로원이 이 노래 제목을 ‘봄날이 간다’가 아니라 ‘봄날은 간다’라고 붙인 건 정말 신의 한 수다. 조사 한 글자 차이지만 앞의 것은 그냥 평범한 산문일 뿐이고, 뒤의 것은 위대한 시다. 이 땅의 많은 시인들이 이 노래 제목 그대로 시를 헌정했다.

영화에서 필을 받은 탓인지 요 며칠 계속 그 노래가 입가에 맴돌았다. 당대의 난다 긴다 하는 가수들이 리메이크해서 절창한 것을 인터넷에서 다 찾아서 들었다. 배호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장사익 심수봉 최백호 한영애 이선희 린 말로 등이 나름대로 개성적인 음색으로 해석했지만, 난 최백호 버전이 가장 좋다. 그 애절함과 무상함과 청승맞음은 따라갈 목소리가 없다. 

요즘 아이들은 노래 ‘봄날은 간다’ 하면 김윤아 것을 떠올린다. 이 영화의 전편에 흐르는 건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하는 백설희 노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는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으로 시작하는 김윤아 노래로 바뀐다. 이 노래 원곡은 일본곡이다. 도회적 느낌이 좀 들지만 가사가 주는 무상함은 47년 전 노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간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2001년)다. 전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도 좋지만 많은 평론가들이 최고의 멜로영화 중 하나로 꼽는 영화다. 줄거리는 사실 뻔하다. 모르던 두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갈등하고 이별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다르다. 순수한 남자와 통속적인 여자다. 그 다름 때문에 둘은 빠져들고 헤어진다. 영화는 두 사람의 감정의 변화를 시간을 따라가면서 담담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아프게 그려낸다. 

상우(유지태)는 한 번도 사랑을 안 해본 남자다. 그래서 은수(이영애)와 사랑에 빠지면서 사랑은 당연히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은수는 이혼 경력이 있는 여인이다. 그녀는 사랑의 유효기간을 이미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순수하게 다가오는 상우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도 사랑이 농도와 깊이를 더해갈수록 그 사랑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사랑의 감정 그뿐이지, 같이 사는 구속이나 김치를 담가야 하는 결혼이 아니다. 둘은 부딪친다. 은수는 상우 몰래 다른 남자도 만난다. 상우는 그런 은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괴로워하다 이내 분노한다. 

상우는 사랑이 영원한 건 줄 알았다. 묻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사진 = 영화 봄날은 간다 캡처)
상우는 사랑이 영원한 건 줄 알았다. 묻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사진 = 영화 '봄날은 간다' 캡처)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그 유명한 대사. 집 앞까지 데려다준 상우에게 은수는 “라면 먹을래?”라고 유혹한다. 라면을 끓이다가 무심히 “자고 갈래요?”라고 내뱉는다. 사랑은 그렇게 갑자기 시작됐다. 하지만 순수와 통속은 현실 속에서 서로 날을 세운다. “우리 헤어지자”는 은수의 갑작스런 선언에 상우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반문한다. 은수에 대한 원망일까, 사랑은 영원하다고 믿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일까. 사랑 그 본질적 속성에 대한 체념일까.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면서 두 사람은 헤어진다. 봄날은 한때였다. 해가 바뀐 봄, 은수는 상우를 찾아온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 둘은 만난다. 그러나 재회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결말이 아니다. 그랬다면 영화는 그저 신파로 끝났을 게다. 

“우리 같이 있을까?” 여자는 팔짱을 끼며 또 다정하게 유혹한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 것일까. 고통과 불면의 시간을 지나며 남자는 깨달았다. 사랑은 되돌릴 수 없고 영원할 수 없다는 걸. 남자는 여자를 말없이 밀어낸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갈게(여자)” “응 잘 가(남자)” 여자는 돌아서 가다 되돌아와 남자의 옷매무새를 고쳐주고 악수를 청한다. 남자는 여자가 떠나는 걸 한참 바라본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두 사람은 비로소 완전하게 이별했다. 여자가 흥얼거리던 노래 ‘사랑의 기쁨’이 흐른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명장면이다.

봄은 절정이지만 사랑은 이미 끝났다. 흐드러진 벚꽃 아래 상우와 은수는 완전히 헤어졌다.
봄은 절정이지만 사랑은 이미 끝났다. 흐드러진 벚꽃 아래 상우와 은수는 완전히 헤어졌다.(사진 = 영화 '봄날은 간다' 캡처)

허 감독은 왜 멜로 영화에 이 제목을 빌려왔을까. 화사한 봄날 벚꽃 터널에서 둘을 헤어지게 했을까.

봄은 사실 오는 게 아니라 가는 거다. 봄은 애당초 가기 위해 오는 거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천지간에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 오는 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건 머물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오는 거다. 봄을 기다리는 의미는 겨울에만 있다. 봄이 오면 이미 봄이 아닌 것이다. 벚꽃은 잠시 눈부실 뿐, 덧없이 낙화한다. 사랑도 봄과 같은 비극성이다. 사랑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별은 다른 한쪽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혼자인 것이다.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성황당 길에 앙가슴 두드리며 알뜰한 그 맹세를 하릴없이 기다리지만 그게 실없는 기약인 걸 안다. 봄은 가고 나만 속절없이 남는 것이다. 그래서 봄은 이별하기에 참 좋다. 

한기봉 칼럼니스트 (hkb821072@naver.com)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문화체육관광부 홍보기획관,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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