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걸’과 미투 캠페인
‘XX걸’과 미투 캠페인
  • 한기봉 전문위원
  • 승인 2018.02.1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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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드 걸’, ‘옥타곤 걸’, ‘워크 온 걸’….
대다수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나도 요즘 보도를 보고 처음 알았다. ‘걸(girl)’이란 단어가 들어가니 여성을 지칭하는 것 같긴 한데, 그런 이름의 잡지 커버 사진에 나오는 여성인 줄 알았다. 포털 이미지 검색을 해봤다. 순간 누가 볼까봐 뒤통수가 따가워졌다. 아슬아슬한 비키니 차림의 젊은 여성들, 그리고 하나같이 섹시한 미녀들 사진이 스크롤바를 한참 내려도 계속 모니터를 가득 채워 눈을 어지럽게 했다. 

‘그리드 걸(grid girl)’은 세계 최고의 자동차 경주 대회인 포뮬러 원(F1)의 출발선(그리드)에서 선수 이름과 스폰서가 적힌 판을 들고 경기를 안내하는 여성을 말한다. 쉽게 ‘레이싱 걸’이라고도 부른다. ‘옥타곤 걸(octagon girl)’은 복싱의 ‘라운드 걸’처럼 8각형(옥타곤) 모양의 이종종합격투기(UFC) 링에서 라운드 회수를 알려주는 여성이다. ‘워크 온 걸(walk on girl)’은 화살을 던져 과녁을 맞추는 다트(dart) 경기에서 안내하는 여성이다. 통상 ‘다트 걸’이라고 불린다.

이 ‘걸’들은 선수들보다 더 카메라 세례를 받는다. 일부 걸들은 선수보다 더 인기가 있어서 ‘플레이보이’ 같은 남성 잡지의 표지 모델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걸’들이 있는데 연예계로 진출하거나 세미 누드 화보집을 내기도 했다. 이 ‘걸’들의 공통점은 굳이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경기의 꽃’이라 불릴 만큼 외모와 신체 조건이 출중하다. 그런데 이 여성들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실직할 위기에 처했다.

▲ BBC 홈페이지 캡처
▲ BBC 홈페이지 캡처

 

포뮬러원은 최근 공식적으로 그리드 걸을 퇴출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수십 년 전통인 그리드 걸은 F1의 필수 요소였으나 그 관행이 현대의 사회 규범과 상충한다고 생각한다”는 게 그 이유다. 그리드 걸은 포뮬러원의 인기 요인 중 하나였지만 그들의 용모와 선정적 복장 때문에 여성의 성상품화라는 비판과 성희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드 걸은 ‘그리드 키드(kid)’로 대체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보다 조금 앞서 영국의 프로다트협회도 ‘워크 온 걸’ 폐지 방침을 밝혔다. 

스포츠계의 성평등을 추구하는 여성운동 단체들은 즉각 환영하면서 다른 스포츠계에서도 여성 진행 요원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종격투기의 ‘옥타곤 걸’과 복싱의 ‘라운드 걸’ 운명도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당연히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오락성이 짙은 스포츠계에서 남성들의 ‘눈요기’는 사라질 판이다.  

물론 오랜 전통을 무시하고 시대적 흐름만을 좆은 정치적 결정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포뮬러원이 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그리드 걸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더 많았다. 일부 선수와 스폰서 기업도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드 걸들도 “우리는 관중을 즐겁게 하고 스폰서를 홍보하며 스포츠의 발전에 이바지해왔다. 일부 극성 페미니스트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됐다”며 반발했다. 

‘XX걸’의 퇴출은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미투’ 캠페인의 여파다. 미투 운동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희롱과 성추행 고발을 넘어 여성 신체의 성적 측면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회문화적 관행에까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XX걸’은 사실 경기의 본질은 아니다. 경기의 도우미일 뿐이다. 그런데 여성들만이 하는 경기에서 근육질에 수영 팬티 차림의 남성 도우미는 본 적이 없다. 오래 전 국내 여성 복싱대회에서 ‘라운드 맨’이 세계 최초로 나왔다는 보도는 본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론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XX걸’은 경기 진행을 보조한다는 명분 아래, 사실은 ‘남성의 눈과 뇌를 위한’ 다른 의도를 숨기고 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TV 메인 뉴스에서 거의 변하지 않는 구도가 있다. 삼촌이나 오빠 같은 남성 앵커 옆에 젊고 용모 단정한 여성 보조앵커가 앉아 있는 그림이다. 언론학자나 여성단체들이 수없이 지적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구도를 고집하는 것을 보면 방송사는 남성만이 뉴스 시청률을 좌우한다는 고정관념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가 보다.  

국내외 모터쇼에는 어김없이 (남자들 표현대로) 정말 숨 막힐 듯 쭉쭉빵빵한 레이싱 모델들이 가릴 곳만 최소한으로 가린 채 반짝반짝 빛나는 차에 비스듬히 기대어 고객의 시선을 유혹한다. 레이싱 걸을 보거나 사진 찍으러 신차 발표회에 간다는 남자도 많다. 

규모가 큰 시상식에서 미소를 지으며 시상자(거의 다 남자다)나 수상자를 안내하는 검은 정장 스커트 차림의 행사 도우미들은 도대체 왜 필요한 건지 모르겠다. 자기가 설 곳이나 나갈 곳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전시장이나 신제품 발표회나 판촉장 등에서 내레이터 모델을 기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걸’들도 어엿한 직업이고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 여성이나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니다. 키가 크고 ‘용모단정’해야 한다. 

높으신 양반들이 오는 행사에서는 왜 꼭 용모 빼어난 여성 안내원을 입구에 배치하고, 기관의 행사나 사내 행사에서의 사회자는 왜 꼭 젊은 여직원을 간택할까. 심지어 대학총동문회의 송년회나 신년회 같은 그들만의 친목 행사에서도 왜 굳이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그래서 참석자들의 면면도 잘 몰라 실수를 연발하는 미모의 여성 사회자를 거금을 주고 데려와야 할까.  

이제 미인대회도 다시 도마 위에 오를지 모르겠다. 미스코리아 대회나 갖가지 이름을 붙인 미인대회는 미투의 시대에서 과연 사회적 규범에 부합하는 것일까. 나는 미스코리아들이 주최 측의 여러 행사에 도우미처럼 ‘동원’되는 걸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생각은 꼬리를 문다. 야구나 농구 경기의 치어걸도 퇴출돼야 하는 것일까. 동계올림픽의 북한 응원단은 왜 다 여자여야 하나. 야구 경기의 치어걸은 괜찮다면 자동차 경주의 레이싱 걸은 왜 문제 삼아야 하는 걸까. 단지 노출이 좀 더 심하다는 이유로? 
 
어느 여성학자가 ‘PBQ’라는 용어를 쓰는 걸 들었다. ‘Professional Beauty Qualification’의 약자다. 남성에겐 적용 안 되는 ‘직업에 필요한 미의 자격 요건’이다. 암묵적으로 능력이 아닌, 용모나 나이를 직업의 적합도로 삼아 고용이나 승진, 사회활동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교묘히 조장하는 것이다. 이는 같은 여성끼리도 위화감이나 상실감, 외모 경쟁에 대한 압박감을 준다. 스포츠 경기나 행사장에서의 ‘XX걸’들이야말로 대표적인 PBQ다. 여성학자들은 여성의 용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여성을 억압하는 대표적 사례라고 주장한다.  
    
‘걸’들을 퇴출시키는 이유는 성상품화에 이용된다는 논리에서다. 한 마디로 여성의 신체가 더 이상 남성의 눈요깃감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관객이 다 남성뿐이지만은 않지만). 상업주의 논리가 우선인 기업이나 주최 측 입장에선 흥행과 수익에 기여하는 ‘걸’을 퇴출시키고 싶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미투의 파도는 거세고 여성계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그 흐름을 거역하면 불매운동 같은 보이콧 사태를 맞을 수도 있다.  

나는 여성차별과 여성의 성상품화 혐의가 짙은 이벤트나 마케팅에는 반대한다. 메인의 구색을 갖추기 위한 엑스트라로,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관음적 대상으로, 남성의 권위와 권력을 돋보이기 위한 도구로써, 여성이나 여성성을 이용하는 우리 사회의 오랜 암묵적 관행에 단연코 반대하고 그런 분위기가 개선되길 바란다.

그런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이런 게 미투 캠페인의 흐름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 든다. 미투 캠페인의 본질은 권력과 지위를 악용한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한 고발이다. 여성차별과 성상품화는 또 다른 문제다. 전자는 사적인 일대일 관계에서의 양심과 권력과 폭력의 문제지만, 후자는 자본주의 시대에서의 복합적인 사회구조적 문제다. 물론 여성의 성상품화가 남성 위주 사회의 집단적 성희롱이라고 의미를 넓혀 해석해 볼 수도 있다

한편으로 ‘XX걸’이든 도우미든 엄연한 직업이다. 전문직이다. 그런 직업군에 종사하는 여성이 상당히 많고, 하고 싶어 하는 여성도 많고, 대행사도 많다. 고용의 관점에서 보면 성상품화란 명분으로 그들이 설 땅을 없애는 게 이 사회가 양해해야 하는 합당한 사유가 되는 걸까. 가치판단에 대한 문제는 사람마다 다른데 근거가 모호한 일방적 해고는 아닐까? 그럼 남성 전용 화장실에서 아무 눈치 안 보고 태연히 청소하는 여성 환경미화원은 왜 거론 안 할까.

▲ 존 워터하우스의 1896년 작 ‘힐라스와 님프들’
▲ 존 워터하우스의 1896년 작 ‘힐라스와 님프들’

 생각이 복잡해진다. 영국 맨체스터 미술관은 최근 명작으로 찬사를 받았던 19세기 화가 존 워터하우스의 1896년 작 ‘힐라스와 님프들’을 전시에서 일시 철거했다. 미소년을 유혹하는 요정들을 누드로 그렸다는 이유에서다. 이탈리아 한 극장에서는 오페라 ‘카르멘’의 원작 결말이 달라졌다. 카르멘이 거꾸로 돈 호세를 죽였다. 연출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 시대 최고로 추앙받은 시인이나 연출가 같은 문화예술인도 미투 한 방에 창작 활동을 접고 그의 작품들이 심판받아야 할 판이다. 그의 작품을 살아남겨야 하나, 용도폐기할 것인가, 논란이 분분하다. 

현재진행형인 미투 캠페인은 가히 ‘역사적’이다. 단순한 고발과 폭로를 넘어 인류의 문화와 사회발전, 남녀평등, 젠더의 문제, 성담론에 획기적 전환점으로 후대가 평가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미투 운동의 확장을 보면 선과 악, 모럴과 반모럴의 이분법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 그 구성원의 현명한 판단을 과제로 던지고 있다. 외면할 수는 없다. 언젠가는 터져야 했던 문제다. 

한기봉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hkb821072@naver.com)
전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전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전 한국온라인신문협회장, 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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