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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몸, 당당한 몸, 존중받아야 할 몸
▲ 미국의 유명한 플러스 사이즈 모델 애슐리 그레이엄.
주간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2016년 수영복 특집호 표지 모델로 나왔다.

▶프랑스 모델 이사벨 카로. 키 165㎝, 몸무게 31㎏. 패션의 역사가 그녀를 기억하는 건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카로는 2007년 이탈리아 사진작가 올리비에 토스카니의 패션 캠페인 모델로 등장했다. 완전한 나체였다. 몸에 거의 달라붙은 앙상하고 처진 가슴, 깡마른 팔과 다리, 살을 뚫고 나올 것 같은 앙상한 갈비뼈, 커다랗고 퀭한 표정 없는 눈은 외계인처럼 보였다. 

그녀는 13세부터 거식증을 앓아왔다. 이 사진은 거식증의 위험을 환기시키기 위한 캠페인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카로는 사망했다. 28세였다.  

▶프랑스 의회는 지난 5월 패션모델 건강보호 법안을 제정했다. 이른바 ‘마른 모델 퇴출법’이다. 이사벨 카로의 사망 이후 굴지의 패션 기업들은 비정상적으로 마른 모델을 퇴출하는 자발적 움직임을 보여 왔다. 하지만 법 제정으로 이제는 모델들이 2년마다 체질량지수(BMI)를 포함한 건강진단서를 보건당국에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 영양 상태가 미흡하다는 판정이 나오면 모델 활동을 할 수 없다. 모델 에이전시나 디자이너들도 그들을 고용할 수 없다.

최근 세계 명품 시장을 주도하는 프랑스 기업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루이뷔통, 디오르)와 케링(Kering, 구찌)도 34사이즈(한국 기준 44)이하의 마른 모델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공동 헌장을 발표했다.

▶유명한 미국 스포츠 주간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지난해 수영복 특집호 표지 모델로 키 175㎝, 몸무게 80㎏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깜짝 등장시켰다. 그 이전 모델들은 모두 6사이즈 이하였다. 16사이즈는 처음이었다. 그 모델은 패션지 글래머가 선정한 ‘2016년 올해의 여성’에 이름을 올렸다. 이어 보그지 영국판 2017 신년호 표지 모델에까지 나왔다.

미국 모델 애슐리 그레이엄. 30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다. 그녀는 자신을 닮은 바비인형까지 출시해 바비인형을 현실로 불러냈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가 한 말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몸매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 꿈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이즈와 형태가 어떻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그건 하나의 권리다. 어린 시절 엄마는 내게 말했다. 당당한 것이 섹시한 것이라고. 당당함이야말로 가장 매혹적인 부분이다.” 

▶한국 여성의 신체 치수. 44, 55, 66, 77, 88…. 그 숫자의 연원은 이렇다. 1981년 국가기술표준원은 당시 20대 성인 여성의 평균 키와 가슴둘레인 155㎝, 85㎝의 끝자리 숫자를 조합해 사이즈 ‘55’를 정했다. 55를 기준으로 키는 5㎝, 가슴둘레는 3㎝ 간격으로 더하고 빼면서 44부터 88 사이즈를 정했다.
 
이 표기는 지금 공식적 치수가 아니다. 여성의 평균 체격이 커지면서 정부는 90년 옷의 치수에 직접 신체 사이즈를 써넣도록 권장했다. 옷 안감 라벨에서 볼 수 있는 ‘가슴둘레-엉덩이둘레-신장’의 숫자나 ‘S/M/L’과 같은 표기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26세의 남자 로비 트립. 그는 지난 8월 인터넷에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수영복 차림의 아내 사라(25)와 다정하게 해변을 거니는 사진들을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누가 봐도 꽤 뚱뚱하게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아내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다.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한다. 그녀의 굴곡진 몸매까지도. 나에게 이 여자만큼 섹시한 사람은 없다. 통통한 허벅지, 커다란 엉덩이, 그리고 귀여운 옆구리살…. 그녀의 몸매와 사이즈는 코스모폴리탄 표지에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내 인생과 마음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남성 여러분, 사회가 당신에게 어떤 여성을 요구해야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라. 현실 속 여성은 AV(성인 에로물) 여배우도, 비키니를 입은 마네킹도, 영화배우도 아니다. 여성 여러분,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어떤 틀 속에 끼워 맞추려 하지 마라. 내가 사라를 사랑하듯 당신의 모습 그대로 사랑해줄 사람이 반드시 나타난다.”

그의 글과 아내의 사진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다는 댓글과 함께 4만 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하지만 사람들이 냉정을 찾으며 분위기는 바로 이렇게 뒤집어졌다.

“남성 페미니스트 가운데 가장 짜증나는 사람은 뚱뚱한 여성을 사랑하는 걸 무슨 혁명이라도 하는 줄 아는 남자다.” “뚱뚱한 나와 사귀는 걸 용감하게 여기거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남자들은 딱 질색이다.” “내 여자 친구는 더 뚱뚱한데,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나는 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를 두고 워싱턴포스트는 이렇게 분석했다.
“통통한 체형의 여성과 사귀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닌데도, 로비의 글은 이를 특별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뚱뚱한 아내를 사랑한다는 그를 용기 있고 훌륭한 남성이라고 칭찬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 인스타그램 ‘body positive’ 캠페인 화면. 몸사진 360만 장 이상이 올라와 있다.

▶인스타그램에 지금 ‘body positive’ 또는 줄여서 ‘bopo’나 ‘body confidence’라고 쳐보자. 놀랍다. 각각 360만 장, 42만 장, 38만 장의 사진이 뜬다. 주로 수영복 차림 여성들 사진이다. 이건 몰카가 아니다. 대부분 사진 속 주인공은 뚱뚱한 여성들이다. 당당하게 터질 듯한 가슴과 살이 몇 겹씩 접히는 허리, 레슬링 선수 같은 허벅지와 엉덩이를 드러냈다. 할머니들도 노년의 몸매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중년의 남성들도 뱃살을 당당히 드러냈다. 

2~3년 전부터 인터넷을 중심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바디 포지티브(몸 긍정성)’ 캠페인이다. 사회나 미디어가 제시하는 아름답고 멋진 몸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뚱뚱하거나 마른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올리는 자발적 운동이다. “내 몸이 뭐 어때서? 나는 이대로의 내 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회 저명인사나 할리우드 스타들도 적잖게 동참했다.

▲ 세계적인 빅 사이즈 의류 브랜드인 레인 브라이언트의 ‘나는 천사가 아니다’ 광고 캠페인.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이전보다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일까. 패션업계는 기민하게 트렌드를 포착했고 분위기를 이끌어나갔다. 세계적인 빅 사이즈 의류 브랜드인 레인 브라이언트는 애슐리 그레이엄을 모델로 내세워 ‘나는 천사가 아니다(I’m No Angel)’라는 광고 캠페인을 벌여 자신의 몸을 긍정하고 사랑하자는 사회적 심리를 확산시켰다. 미국에서 엔젤(angel)이라는 단어는 늘씬한 몸매의 속옷모델을 일컫기도 한다. 미국 대표적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이 패션쇼 무대에 서는 전속모델을 엔젤로 부르면서부터다. 레인 브라이언트의 흑백광고에는 뱃살이 접히는 백인 흑인 여성들이 속옷을 입고 “I’m No Angel”을 외치며 완벽한 몸매의 모델을 내세운 빅토리아 시크릿의 화려한 ‘더 퍼펙트 바디’ 광고와 대적했다.

미국이나 유럽의 기성 의류업계들도 플러스 사이즈 여성을 위한 의류 라인업을 확장했고 이들만을 위한 전문 브랜드들도 속속 생겨났다. 플러스 사이즈 여성의류 매출도 크게 증가했다. 

국내에선 지난해 비비안의 ‘헬로 마이핏(Hello My fit)’ 광고 캠페인이 큰 인기를 끌었다. 다양한 체형을 지닌 여성을 내세우며, 멋진 몸매라는 획일적 기준은 원래 없는 것이며 가장 아름다운 핏은 이미 내 안에 갖고 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바디 포지티브 캠페인은 뚱뚱하면 절대로 아름답게 보이지도, 아름답게 보지도 않는다는 가혹하고 획일적인 공식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다. 미에 대한 다양한 기준을 불러일으킨 것도 분명하고, 날씬하지 않은 여성들이 당당하게 커밍아웃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바디 포지티브 캠페인의 기수 역할을 한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도 외모는 아름답다는 것이다. 애슐리 그레이엄은 얼굴도 배우처럼 예쁘고, 그저 가슴과 엉덩이와 허벅지의 사이즈가 평균보다 많이 클 뿐 허리는 잘록한 콜라병 몸매다. 허리까지 뚱뚱한 플러스 사이즈 여성들이 상실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사람은 누구나 당당하면 아름답다. 뚱뚱한 여자가 당당하다해서 아름답게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게 온당한 것일까. 뚱뚱하거나 비쩍 마른 여성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당당한 건 평가할 수 있다 치자. 하지만 자신이 그런 체형인 건 사실 참기 어렵다. 그만큼 아름다운 체형에 대한 선망은 본능적이다. 

바디 포지티브 캠페인을 주도한 디자이너 맬로리 던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몸 긍정이 1년 365일 자신을 아름답고 대단하다고 느껴야 한다는 건 아니다. 불가능한 미적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않는다는 것이지, 자기 외모의 모든 측면에 경탄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소파에 앉아 하루 종일 정크 푸드를 먹으며 자신을 돌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건 아니다.” 

▶어렵다. 아름다운 몸은 아름다운 몸일 뿐이다. “어떤 몸이든 존중받아야 한다”는 개념과는 좀 다른 게 아닐까. 바디 포지티브 캠페인은 “Every size is beautiful, and every size is healthy!”(모든 사이즈는 아름답고, 건강하다)라고 외친다. 이건 그냥 듣기 좋은 카피이고 말장난이 아닐까. ‘날씬한 몸=건강한 몸’이 항상 정답이 아닌 것처럼, ‘뚱뚱한 몸=건강하지 않은 몸’도 정답이 아니다. 

모든 체형이 다 아름답고 건강한 건 아니다. 자기 몸을 존중하자는 운동이 곧 ‘모든 몸은 아름답고 건강하다’는 논리에 기대고 있다면 나로선 좀 어색하게 들린다. 인스타그램에 내 몸사진을 올리는 건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인증’일 뿐이다.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도 날씬하고 건강한 몸을 갖고 싶다. 노력도 수없이 해봤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내 몸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누가 뭐라 해도 난 내 몸의 당당한 주인이니까. 그런데 내가 뚱뚱하다 해서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용서할 수 있지만, 건강하지 않거나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약한 여성으로 보는 뒷담화는 용서할 수 없다. 언젠가는 멋진 몸매를 갖겠다는 희망까지 버린 건 아니다.” 
여러분은 바디 포지티브 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기봉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hkb821072@naver.com)
전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전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전 한국온라인신문협회장, 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한기봉  press@lovesbeaut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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