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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캉스가 뭐길래
▲ 1973년 해운대도 붐볐고, 지금 해운대도 붐빈다. 앞으로도 붐빌 것이다. ⓒ 국가기록원 제공, 해운대구청 홈페이지 캡처

일 년에 한 차례, 길어봤자 달랑 일주일. 여름에는 거의 누구나 이 ‘미션’을 완수해야 한다. 가장이든 싱글이든 그 미션에서 해방되기는 어렵다. 그 미션 수행은 사실 자의적이지도 않다. 다들 떠나니까 떠난다. 이 때 아니면 못 가니까 간다. 휴가를 자신이 원할 때 자유롭게 선택하게 해야 한다는 말은 오래 전부터 많았지만 직장이나 학교,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견고하다. 남들 갈 때 가야 눈치 안 보고 편하다. 그나마 일주일이라도 받으면 다행이다.  

휴가니 피서니 하는 말보다 바캉스는 어감부터 좀 다르다. 프랑스어인 바캉스(vacance)의 어원은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비우는 것’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버케이션(vacation)이다. vac~과 그 변화 형태인 van~은 ‘비어있는’이라는 의미가 담긴 어근이다. vacuum(진공) evacuate(비우다) vanity(허영, 공허) van(빈 공간이 넓은 자동차) 같은 단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익숙한 영어보다 왜 프랑스어인 vacance를 많이 쓰는지 과문한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검색을 하다 보니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사전’(이재운 저, 2003년)에 바캉스에 대한 이런 설명이 있다. 

“프랑스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파리 사람들이 휴가를 극성스럽고 떠들썩하게 떠나고 즐기는 통에 바캉스라고 하면 이름난 휴양지나 해수욕장에서 그럴듯하게 즐기고 오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 영향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도 바캉스라고 하면 어딘가 그럴듯한 산이나 바다에 다녀와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글쎄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좀 억지스러워 보이기도 하는데, 아무튼 ‘버케이션’이란 영어 단어보다는 ‘바캉스’가 훨씬 그럴듯해 보이고, 있어 보이고, 고급스럽게 들리긴 한다. 입을 크게 벌려서 발음하는 ‘바~캉~스’의 어감에는 이미 바다 냄새가 풍긴다. 

프랑스가 휴가의 원조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프랑스는 1936년 세계 최초로 근로자 유급휴가제도를 만든 나라다. 당시 주당 40시간 노동, 연간 15일 휴가를 법제화했다. 이후 점점 길어져서 현재는 5주의 법정 유급휴가가 되었다.

프랑스 바캉스와 코리아 바캉스 문화는 많이 다르다. 보통 7, 8월에 가는 건 같지만 프랑스인들은 대체로 3~4주 긴 휴가를 간다. 파리지앵들은 거의 집을 비우고 샹젤리제 거리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더 많다고 한다. 일할 사람이 없어서 작은 업체나 식당은 아예 문을 닫는다. 프랑스인은 휴가를 즐기기 위해 일을 한다는 기본 마인드가 있다. 프랑스인이 형편없는 요리를 ‘영국 요리’라 부르듯, 영국인은 제멋대로 노는 휴가를 ‘프랑스 휴가’라고 부른다. 

불어에 쥐이에티스트(juillettiste)와 우티앵(aoûtien)이란 단어가 있다. 쥐이에(juillet)는 7월, 우(août)는 8월이다. 거기에 사람을 뜻하는 어미가 붙은 거다. 7월에 떠나는 사람이 있고, 8월에 떠나는 사람이 있다. 7, 8월의 초입은 그랑 데파르(grand départ)라고 표현한다. 거창하게 해석하면 ‘대출정’ 정도 되겠다. 이때쯤 그들이 가장 빈번하게 주고받는 인사는 “본느 바캉스(Bonnes vacances)”다. 휴가 잘 보내라는 것이다. 

우리는 고작 3~4일 떠나면서 매년 어디를 갈까 고심하느라 스트레스가 쌓이지만, 프랑스인들은 3~4주를 떠나다보니 매년 가는 곳이 대체로 정해져 있다. 산악지대나 해변 도시, 별장, 전원, 시설이 완비된 캠핑장 등이다. 

“누구도 내게서 휴일을 뺏을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휴가 이야기가 최근 보도됐다. 9년째 이탈리아 북부 산악 휴양지인 티롤의 같은 호텔에서 남편과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사진을 비교분석한 결과 최소한 연속 5년째 동일한 자주색 체크 무늬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 차림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실 우리 눈높이로는 매우 촌스런 패션이다.

우리의 가족 바캉스는 아이가 주인공이다. 날짜 장소 숙박시설 놀이 등을 아이에 맞춰야 한다. 부모는 보호자일 뿐이다. 프랑스는 그렇지 않다. 지자체와 학교마다 국가 지원으로 다양하고 긴 방학캠프가 있어서 아이들은 보통 여기에 참여한다. ‘콜로니 드 바캉스’라는 프로그램이다. 매년 1000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3만 개가 넘는 이 캠프에 참여한다고 한다. 부모 소득별로 내는 비용이 열 배 이상 차이가 난다. 그래서 부모는 호젓하게 떠날 수 있다. 

프랑스와 바캉스 이야기는 각설하고, 나는 우리 휴가 문화에 참으로 유감이 많다. 평소에 “집이 최고야. 집 떠나면 X고생이지”란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내 친구도 휴가철이 돌아오면 의식을 치르듯이 떠난다. 리조트나 휴양 시설이 많이 들어서고 해외로 가는 사람도 많아지면서 바캉스 전쟁, 바캉스 지옥이란 표현은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미디어에 비치는 휴가철 뉴스는 몇 십 년째 같다. 여전히 물 반 사람 반인 해수욕장과 계곡, 미어터지는 고속도로, 바가지 상혼, 지저분한 쓰레기 등이다.

OECD 선진국의 여러 통계 중 휴가 만족도 지표가 있다면 우리나라가 꼴찌가 아닐까. 우리의 바캉스는 힐링이자 휴식이자 재충전과는 거리가 먼, 여전히 일 년에 한 번 치러야 하는 전투다. 전문가들은 조용한 곳에서 사색하고 책을 읽고 심신을 재충전하면서 휴가의 본래 의미를 찾으라고 말한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 전문가 역시 그렇게 하기 힘들 것이다. 

인구밀도는 높고 땅은 좁고 산과 계곡과 바다와 해수욕장은 제한적이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 있지 않는 이상 호젓한 곳을 찾을 수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휴가기간이 7월 말~8월 초 불과 두 주간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공장은 협력업체와 같은 기간에 함께 쉬어야 하기 때문에 휴가 도미노 현상이 일어난다. 심지어 법원도 이 기간에 휴정한다. 학교의 방학은 제법 길다 하더라도 사교육 시장의 방학은 8월 초에 집중돼 있다. 학원 안 보내고 아이 손 잡고 휴가 떠날 배짱을 가진 부모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집과 호텔, 도심에서 머물며 휴가를 보내는 ‘스테이케이션’(stay+vacation)이니 ‘홈캉스’(홈+바캉스)니 ‘호캉스’(호텔+바캉스)니 하는 신조어들이 낯설지 않다. 1인 가구가 많아진 이유도 있지만 판에 박은 듯한 휴가 풍경과 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다. 거실에 누워서 엄두도 못 냈던 영화나 미드 몰아보기도 좋고, 맛집 순례도 좋고, 요리 해보기도 좋고, 하루 한 권 소설책도 떼보고, 호텔 수영장에서 놀아보고, 아이들과 게임도 하고 노래방도 가보고, 한강공원이나 도시 근교 발 닿는 곳 아무 곳에 당일치기 텐트도 쳐본다.  

정부가 여름휴가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몇 년 전부터 봄가을에 관광주간을 시행 중이지만 아직은 별 효과가 없다. 방학을 정하는 데 학교장 재량을 더 주어야 하고, 공공기관이나 기업의 휴가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유급휴가 기간도 늘려야 하지만 휴가에 관한 한 우리 사회 시스템은 꽉 막혀 출구가 없다.  

대통령부터 나서 휴가를 독려했다. 정부, 기업, 근로자가 함께 적립해 휴가비를 지원하는 프랑스식 ‘체크바캉스’ 도입도 추진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한국의 여름은 지옥철이다. 그리고 휴가 장려가 내수 진작에 목적이 있다면 그건 휴가의 본질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매년 여름마다 인천공항 출국자 수는 기록을 갱신할 것이다.

이제 휴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자. 왜 꼭 7말 8초여야 하는가. 설렘보다 스트레스를 주는 이유는 뭘까. 왜 미션을 수행하듯 휴가에 옭매여 있을까. 계곡에 발 담그고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어야만 하는가. 남들이 떠나면 나도 떠나야 하는가. 

어차피 이 기간을 피할 수 없다면, 이런 휴가에 질렸다면 내가 바뀌는 수밖에 없다. 발상의 대전환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휴가는 경쟁도 과시도 아니다. 정답은 ‘쉼’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인문학적 성찰을 해보면 나오지 않을까. ‘쉴 휴(休)’자는 사람이 나무 곁에 있는 형상이다. 여름 바캉스, 충전은 어렵다 해도 최소한 방전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기봉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hkb821072@naver.com)
전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전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전 한국온라인신문협회장, 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한기봉  love@lovesbeaut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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