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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셔츠로 말하기

티셔츠의 계절이다. 거리를 걸으며 유심히 티셔츠 패션을 본다. 

티셔츠는 간소하지만 변주가 다양하다. 화이트 티셔츠에 롱스커트나 원피스를 매치하면 여성스럽고 편안하게 보인다. 블랙 슬랙스를 매치하면 심플하고 모던해 보인다. 스트라이프 패턴의 티셔츠는 약간 포멀한 느낌을 주면서 세련돼 보인다. 한쪽 어깨를 언밸런스로 드러낸 오프 숄더는 옷의 주인공이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배꼽과 허리가 나온 크롭 티셔츠에 짧은 핫팬츠를 입은 여성을 보면 눈이 부시다. 가끔은 대담한 브라탑이나 나시탑에 눈을 둘 곳이 없다. 시선을 고정하다간 레이저를 맞을 수 있다. 찢어진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은 청년에게는 젊음의 순결한 에너지가 물씬 풍긴다.

티셔츠의 역사는 바지나 치마처럼 길지는 않다.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지금의 티셔츠 모양의 디자인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티셔츠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군인들의 속옷으로 자리를 잡았다. 1913년 미 해군은 티셔츠를 공식 유니폼 중 하나로 지정했다. 1920년 웹스터 사전은 티셔츠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등재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군들이 고향에 가져가면서 티셔츠는 일반에게 대중화하고 겉옷으로 진화한다. 

2차 대전 당시 군납용 티셔츠를 제작했던 미국 회사는 이런 광고를 했다. “You needn’t be a soldier to have your own personal T-shirt.” (당신만의 티셔츠를 갖기 위해 꼭 군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티셔츠의 해방은 미국의 전설적 배우인 말론 브랜도와 제임스 딘 두 남자에게 빚진 바 크다. 

1951년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거칠고 야성적인 스탠리(말론 브랜도)는 근육이 그대로 툭툭 튀어나 보이는 하얀 티셔츠를 입고 짐승 같은 눈빛으로 블랑쉬(비비안 리)를 바라보고 능욕한다. 티셔츠가 속옷에서 나와 패션으로 독립하는 순간이다. 그의 몸에 딱 붙는 티셔츠를 구할 수 없어 특별히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55년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이 나왔다. 24세의 제임스 딘은 청바지에 흰 티셔츠, 붉은 재킷을 걸치고 10대의 방황과 반항과 혼돈을 표출하면서 일약 젊음의 우상이 된다. 그리고 얼마 후 돌연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다. 그의 패션은 미국의 청춘들을 열병처럼 휩쓸었다. 브랜도가 티셔츠를 패션으로 등극시켰다면 제임스 딘은 거기에 자유와 젊음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입혔다.

요즘 거리에서 시선을 멈추게 하는 티셔츠가 있다. 밋밋한 무지가 아니라 앞뒤 또는 주로 등 쪽에 레터링이 된 셔츠다. 작년부터 여름 트렌드로 주목을 받고 있다. 국내외 브랜드들이 경쟁하듯이 레터링 티셔츠를 출시하고 있다.

나는 셔츠의 스타일보다는 글씨에 시선이 간다. 무언가 의미 있는 글을 보게 되면 안 보는 척 읽어본다. 그 의미를 알고 입었을까 싶을 정도로 독해가 난해한 글들도 봤다. 대다수 영어다. 가끔 불어나 독일어도 있다. 멋진 한글 캘리그라피도 가끔 보는데 한글 레터링이 좀 더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어디서 그런 글귀를 찾아내거나 창작할까도 궁금하다. 

티셔츠에 로고나 그림, 문자가 들어가기 시작한 건 오래 되지 않았다. 알베르토 코르다가 찍은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얼굴이 프린팅된 티셔츠가 등장한 것은 1960년대 말이다. 이후 프랑스 68혁명의 파리 대학생들도 체 게바라의 셔츠를 입고 거리로 뛰어나왔다. 이때쯤 비틀즈와 롤링스톤즈의 얼굴 티셔츠도 유행했다. 우리나라에선 한참 늦게 민주화가 이뤄진 후 체 게바라 티셔츠가 등장했다.

이후 티셔츠는 단순한 패션의 경계를 넘어 말을 하기 시작한다. 개인의 신념이나 정체성을 알리거나 시대의 정치사회적 아이콘이 된다. 

티셔츠에 글이, 구호(슬로건)가 들어가기 시작한 첫 사례는 1948년 미국 대선의 공화당 후보였던 토마스 듀이 지지자들이 대선 캠페인에서 입은 것으로 패션사에 기록돼 있다. 티셔츠에는 ‘Dew it with Dewey(듀이와 함께 촉촉한 인생을)’라고 썼다. 

단순한 로고가 아닌 글을 새긴 티셔츠를 보통 스테이트먼트(statement) 티셔츠, 슬로건 티셔츠, 메시지 티셔츠, 캠페인 티셔츠라고 부른다.

1964년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로 개입하자 ‘NO WAR’가 새겨진 반전 슬로건 티셔츠가 미국 대학가에서 크게 유행했다.

1975년 밀튼 글레이저가 디자인한 ‘I ♥ NY’ 로고는 티셔츠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다. 뉴욕시가 관광을 홍보하기 위해 의뢰한 것인데 세계 여러 도시로 퍼져나가면서 가장 유명한 티셔츠 그래픽 중 하나로 남았다.

1985년 영국에서는 미국의 퍼싱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문제를 놓고 찬반 논란이 벌어졌다. 영국의 윤리적 패션디자이너로 불리는 캐서린 햄넷은 그해 ‘올해의 디자이너상’을 받아 마가렛 대처 총리가 주최한 칵테일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녀는 파티장에 하얀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티셔츠에는 ‘58% Don’t want PERSHING(58%는 퍼싱 미사일에 반대한다)’라는 글이 크게 쓰였다. 그 사진이 보그지에 소개됐다. 

여성 총리의 이브닝드레스와 패션디자이너의 슬로건 티셔츠가 대립하는 이 장면은 티셔츠의 정치적 파워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진으로 손꼽힌다. 

2000년대 들어 티셔츠의 힘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나라에서는 ‘BE THE REDS’가 새겨진 붉은 티셔츠가 전국을 물들이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2000만 장 이상 판매돼 단일 티셔츠 세계 기록을 세웠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는 ‘ANTI WAR’, ‘ANTI BUSH’, ‘ANTI BLAIR’ 티셔츠가 거리를 휩쓸었다.

2011년 뉴욕 월가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진 ‘OCCUPY WALL STREET(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는 티셔츠를 이용한 집단의 힘과 의사표현의 정점을 찍었다. 지난해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후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입은 티셔츠, 우리나라의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하야’ 티셔츠들은 정치 슬로건 티셔츠의 계보를 이어갔다.

티셔츠가 꼭 정치사회적 메시지만을 주장한 건 아니다. 캠페인을 통한 기부나 사회공헌 같은 움직임이 티셔츠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2011년 유니세프와 미국의 티셔츠 회사가 아프리카 어린이 구호를 위해 손을 잡은 ‘굿셔츠(Good Shirts)’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루이뷔통의 수석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가 주도한 흥미로운 프로젝트도 나왔다. ‘Protect The Skin You’re In(당신의 피부를 보호하라)’이라는 글귀가 들어간 티셔츠를 대스타들의 누드에 입힌 것이다. 나오미 캠벨, 빅토리아 베컴 등이 누드모델로 참여했다. 피부암 예방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판매 수익금은 암 치료센터에 기부됐다. 국내에서도 여러 브랜드들이 연예인과 함께 이런 티셔츠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국내에도 크게 유행한 슬로건 티셔츠는 크리스찬 디오르가 2016년 파리 패션위크에서 선보인 ‘We should all be feminist(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티셔츠다. 작년에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의 책 제목이다. 페미니즘을 주창하는 메릴 스트립, 엠마 왓슨, 스칼렛 요한슨, 케이트 블란쳇, 제니퍼 로렌스 등이 입었다. 국내에선 배우 김혜수가 가장 먼저 입었고 여성을 중심으로 거리로 퍼져나갔다.  

슬로건 티셔츠는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2016년에 국내에 메갈리아 티셔츠 파문이 오래 갔다. 페미니즘 커뮤니티인 메갈리아가 모금을 위해 ‘Girls do not need a prince(여성은 왕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적힌 티셔츠를 만들었다. 한 여성 성우가 이것을 입고 SNS에 올린 한 장의 사진이 남녀혐오 논쟁을 촉발했다.  

‘남의 집 귀한 자식’ 티셔츠를 기억하는가. 지난해 진상고객의 갑질을 견디다 못한 알바생들이 이 셔츠를 입고 일하는 사진을 SNS에 잇달아 올렸다. 우리도 내 부모의 귀한 자식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메시지다.  

티셔츠가 진화했다. 입는 개념에서 말하는 개념으로 그 기능을 넓혔다. 이 시대의 티셔츠는 깃발이자 피켓이자 매체이자 때론 투쟁이다. 유명인사들은 자신의 정치사회적 주장이 담긴 티셔츠를 입고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동조자를 만든다. 집단이 같은 걸 입으면 시대의 기호가 된다. 티셔츠 자체가 언어이며 착용 자체가 행동인 것이다. 사회적 이슈나 대규모 집회가 열릴 때 같은 메시지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사람끼리는 연대감과 동질감을 갖는다.

개인에게는 메시지가 적힌 티셔츠가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어떤 행동을 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심리적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 메시지대로 따라 행동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비싸도 만 원을 넘지 않는, 세일하면 세 장에 만 원인 티셔츠가 이쯤 되면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여름에 쉽고 센스 있게 코디하기 가장 좋은 게 티셔츠다. 청춘은 하얀 티셔츠와 찢어진 청바지만으로도 충분히 멋지다. 거기에 나만의 메시지를 새기면 패션은 개념을 입는다. 티셔츠 한 장으로 가장 쉽고 개성적으로 그리고 스타일리시하게 나를 표현하고 싶다. 어차피 패션은 메시지가 아닌가. 

한기봉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hkb821072@naver.com)
전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전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전 한국온라인신문협회장, 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한기봉  love@lovesbeaut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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