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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게는 우리 곁에 있다

[러브즈뷰티 한기봉 기자]칫솔 행주 수세미 기저귀 앞치마 도마 수저통 머그컵 접시 행거 건조대 샤워커튼 액자 무드등벽걸이달력 모니터받침대 컵받침 방석 소파패드 화분 돗자리 벽시계 단추, 심지어 선풍기안전망까지….
어느 나라 제품 또는 스타일일까. 눈치 빠른 사람은 알 거 같다. 특히 살림살이에 관심 많은 주부라면. 정답은 북유럽이다. 대다수 상품 품목과 브랜드가 망라된 네이버 쇼핑 검색창에 북유럽이라고 쳐봤다. 무려 120만 개의 상품이 검색됐다. 프랑스는 100만, 영국은 40만 개였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북유럽은 선망의 대상이 됐다. 모범적인 국가 사회 체계, 행복한 삶의 교과서처럼 통한다. 국민을 위한 정치, 부패와 권위가 없는 공직, 탄탄한 사회안전망과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 청정 자연과 친환경, 여유 있는 노년, 창의적 교육, 기술이 있는 강소국, 성의 평등, 이런 큰 것뿐만 아니다.  

사실 사람들을 더 매혹시킨 건 스타일이다. 북유럽 스타일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른다. 십여 년 전부터 인테리어와 디자인, 가구에서부터 시작하더니 패션을 거쳐 노르딕 퀴진이라 불리는 북유럽풍 식당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SPA 패션브랜드인 H&M이나 가구 이케아가 북유럽 브랜드라는 걸 이제는 다 안다. 요즘엔 아파트 광고에도 북유럽풍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세련되고 심플하고 개성적이고 친자연적이고 실용적이고 유행을 타지 않는…. 그런 느낌을 풍기는 게 북유럽 스타일, 스칸디나비아풍이다.
   
그러더니 이제는 라이프스타일로 옮겨갔다. 보이는 것에서 나아가 삶의 태도 자체를 북유럽풍으로 살려는 열망이 더해졌다. 바로 ‘휘게(hygge)’다. 휘게는 가족이나 친밀한 사람들과 함께, 또는 혼자서 소박하고 아늑한 시간을 보내는 덴마크의 라이프스타일을 말하는 단어다. 

덴마크인들의 삶에는 휘게가 수백 년 동안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영국의 사전 전문 출판사 콜린스사는 휘게를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트럼피즘(Trumphism,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열광하는 현상)’과 함께 2016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을 정도니 휘게 바람은 유럽에도 부는 것 같다. 

트렌드는 서점에서부터 감지된다. 휘게의 철학을 설파하는 책들이 작년 하반기부터 10여 권 이상 쏟아져 나오고 있다. ‘휘게 라이프’ ‘휘게 스타일’ ‘편안하게 따뜻하게 휘게’ ‘휘게 덴마크식 행복 라이프스타일’ 등의 제목을 달고 있다. 심지어 ‘휘게 섹스’란 책도 있다. 

왜 휘게일까. 그들은 왜 행복할까. 덴마크는 유엔이 작년에 발표한 세계 행복지수 1등 국가다. 옆 나라들인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랜드가 모두 10위 권 안에 있다. 우리나라는 56위다. 최근 한 신문이 ‘잃어버린 저녁을 찾아서’란 기획 시리즈를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현지 취재를 한 지역도 북유럽이다. 

휘게 라이프를 소개한 책들을 봤다. 소개된 휘게의 소품들은 소소한 이런 것들이었다. 장작과 벽난로, 식탁보, 향기 나는 색색의 양초, 자연채광, 순백색 커튼, 패브릭 소품, 푹신한 쿠션, 라벤다 주머니, 펠트 슬리퍼, 비니 모자, 머그잔, 꼬마전구, 생화 한 송이, 호박 조각, 아이스 바닐라 쿠키, 시나몬 핫초코, 베리 잼, 생강빵, 오픈 샌드위치, 호밀빵, 훈제연어, 시나몬롤…. 휘게는 오감이라고 한다. 그들은 오감에서 행복을 느낀다. 휘게는 안락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사람들과 편안하게 담소하고 휴식하는 게 우선이다. 

덴마크인들이 즐기는 행동으로서의 휘게는 이런 거였다. 겨울 해변 걷기, 숲길 걷기, 눈밭에서 놀기, 자전거 타기,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 만들기, 밀가루 반죽하기, 모닥불 피우기, 산울타리에 열린 과일 따기, 촛불 목욕, 향주머니 만들기, 난롯가 옆에서 독서하기, 텃밭 가꾸기, 식물 키우기,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 감상, 명상 음악 듣기, 친구들과 게임하기, 호박 조각하기, 벼룩시장 가기, 작은 도서관 가기, 피아노 배우기 등등이다.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서 ‘라테 파파’가 화제를 모았다. 커피를 든 채 유유자적하게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는 스웨덴 남자를 그렇게 부른다. 북유럽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놀라운 건 스웨덴에는 육아휴가를 반드시 부부가 나눠 써야 한다는 법이 있다. 이런 게 그들의 휘게 스타일이다.

사실 휘게는 대단한 것도 아니다. 먼 데 있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발명도 아니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에서 시작된 자연친화적 공동체 삶인 ‘킨포크(kinfolk)’ 라이프라든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에서 확산된 ‘단샤리’(斷捨離, 미니멀 라이프)도 그런 것이다. ‘욜로(You Only Live Once)’도 같은 맥락이다. 

더는 과거와 같은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도 없고, 그걸 지향하는 삶을 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찾아낸 대안은 물질이 아닌 환경과 사람이다. 현대 도시사회의 빠르고 경쟁적이고 자극적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힐링을 추구하며 소소한 행복감을 갖는 것이다. 기능적 가치에서 심리적 가치로 옮겨가는 것이다. 제주 소길댁 이효리 같은 경우다.

나는 휘게를 소개한 책들을 훑어본 끝에 휘게의 키워드를 ‘일상’ ‘소박’ ‘함께’라는 세 가지로 나름 결론을 내렸다. 휘게의 무대는 일상이며, 그 방법은 소박함이며, 그 정신은 함께 한다는 것이다. 익숙한 일상의 것들에서 행복의 요소를 찾아내고, 소소한 것에 감사하며, 소박하게 자신이 가진 것에 최선을 다하고, 남과 함께 공감하며 누리는 것이다.  

물론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세금을 낸 만큼 최고의 복지 제도가 있지만, 오랜 세월 사회 구성원들이 공감하고 실천해온 삶의 정신과 철학이 있던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고, 환경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고, 이웃을 배려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중시하고, 화려함과 유행보다는 소박과 단순, 실용성을 추구하는 정신이다. 

북유럽 국가들이 세계적으로 1인 가구 비율이 가장 높지만 고독사나 혼밥이나 혼술은 없다. 그 사회를 관통해온 ‘혼자, 그리고 같이’라는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성은 지켜가면서도 가족과 친구 이웃 공동체를 소중히 여긴다. 소외와 분리가 없다. 그게 균형적 삶의 방식이다. ‘휘게’는 바로 그 산물이다. 나로 살지 못하면 함께 살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일자리가 부족하고, 경쟁과 배타가 심하고, 저녁이 실종된 우리 사회가 북유럽풍을 꿈꾼다는 게 사치일 수 있다. 너무 삶이 팍팍하다 보니 흉내라도 내보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휘게의 정신만은 수입할 만하다. 어려운 게 아니니까. 오늘부터라도 당장 내 주변에서 나만의 휘게를 찾아보자. 식사를 하기 전 식탁 위에 촛불을 켜고 음악을 트는 게 휘게의 시작이라고 한다. 덴마크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소개한 어떤 책 제목을 봤다. ‘덴마크 사람은 왜 첫 월급으로 의자를 살까.’ 

한기봉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hkb821072@naver.com)
전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전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전 한국온라인신문협회장, 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한기봉  love@lovesbeaut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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