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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옷장 앞에 선 그대, 여성에게

만약 남자와 여자가 직장에 매일 같은 옷을 입고 출근한다고 치자.
어떤 반응이 나올까. 
남자에겐 이런 말이 나올 법하다
“저 남자 검소하네. 일에만 신경을 쓰나 보다.” 
왠지 그는 친근해 보이고 모범사원 같고 개념도 있어 보인다.
여자에겐 어떤 뒷말이 나올까?
“저 여자, 좀 이상한 거 아냐? 지가 뭐라고, 좀 삐딱하고 까칠한 거 같애.”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사진’이 돼버린 이정미 전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의 분홍빛 헤어롤 머리.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올림머리와 대비되고, 일에 헌신하는 여성의 상징이 돼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 외신에까지 등장했다.

만약 남자 재판관이 바지 벨트를 안 매고 출근했다면? 
사진거리가 되지도 않고 화제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남자의 실수일 뿐이다. 

‘헤어롤’에 대한 언론의 엄청난 호들갑을 한 꺼풀 뒤집어 본 칼럼들이 좀 있었다. 우리 사회의 이중적 잣대를 본 것이다. 아무리 성공한 여성이라 할지라도 여성은 치장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했다. 

그녀에 대한 과도한 칭송, 그 혀 밑에는 “여성은 일도 잘 해야 하고 치장에도 소홀하면 안 된다”는 우리 사회 남성 위주의 고정관념이 숨어있다. 여성은 외모를 꾸미느라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에 업무에 소홀하다는 평소의 생각이 반영된 게 아닌가라는 의심이 든다(경희대 이택광 교수).

▲ 회색 티셔츠만 가득한 마크 저커버그의 옷장. ⓒ 저커버그 페이스북

작년 한국일보에서 읽은 기사를 인용한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가 두 달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회사에 돌아오면서 ‘복직 첫 날, 뭘 입지?’라는 제목으로 똑같은 회색 티셔츠가 가득한 옷장 사진을 찍어 올렸다. 이틀 만에 120만 개의 ‘좋아요’가 답지하고 7만 1200개의 댓글이 달렸다. 대부분 칭찬이었다.

▲ 페이스북의 수장 마크 저커버그

그는 한 인터뷰에서 왜 회색 티셔츠만 입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최대한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가능한 한 다른 모든 의사결정을 최소화하고 일에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무엇을 입을지,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등과 같은 사소한 의사결정마저 피로를 쌓이게 하고,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에너지를 우스꽝스럽거나 하찮은(silly or frivolous) 개인 일에 낭비한다면 나의 본분에 전념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검은 터틀넥 셔츠만 고집한 고 스티브 잡스.

변함없는 검정 터틀넥 티셔츠에 리바이스 청바지, 뉴발란스 스니커즈 차림의 애플 창업자 고 스티브 잡스도 그런 부류였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비슷하다. 저커버그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니까 티셔츠를 입고, 오바마는 백악관에서 일하니 말쑥한 정장 차림이지만 패션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원칙은 같다. 

“앞으로 여러분은 내가 회색이나 청색 정장만 입은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의사결정의 숫자를 줄이려고 한다. 나는 결정해야 할 게 너무 많다. 사소한 것들에 신경을 쓰며 하루를 보낼 수는 없다.” (2012년 미국 잡지 베너티 페어와의 인터뷰)

반복적 의사 결정으로 힘들어 하는 걸 ‘결정피로군’이라고 한다.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간 이 남자들에게 패션은 단지 결정피로의 지수를 높이는 ‘사소한’ ‘개인적’ 항목이었을 뿐이다. 이런 사람들의 옷장을 ‘캡슐 워드로브(capsule wardrobe)’라고 부른다.

이쯤에서 당연히 질문하고 싶어질 것이다. 
저커버그나 잡스나 오바마가 여자였다면 어땠을까?  

언제나 쓰리버튼 재킷에 펑퍼짐한 바지로 ‘아줌마 패션’을 고집하는 메르켈 독일 총리. 
샤넬을 이끄는 독일 출신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우리는 메르켈에게 더 좋은 바지를 만들어줄 재단사를 찾아야 한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고집스럽고 변함없는 그녀의 스타일은 업무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패션 테러’라는 조롱과 풍자를 받고 있다. 

패션에 신경을 안 쓰고 단벌로 버티는 남자가 자기 본분에 충실한 리더라면, 그 미덕이 왜 여자에겐 통하지 않는 걸까? 
패션이 ‘하찮은’ 거라면 남녀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돼야 마땅하지 않을까?
패션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여성 최고 권력자나 CEO들은 옷을 사고 고르느라 자기 본분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말인가?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나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 같은 지도자 말이다.

▲ 1년에 한 번 ‘마틸다처럼 입는 날’에서 사치앤사치 직원들이 똑같이 입었다 ⓒ 마틸다 페이스북

여기 그 이중적 의식을 시원하게 깨버린 여자가 있다.
세계적 광고대행사 사치앤사치의 아트 디렉터 마틸다 칼은 ‘마틸다처럼 입는 날’을 만들게 한 여자다. 그녀는 어느 날 아침 일찍 열리는 중요한 회의에 뭘 입고 갈까를 고민하다가 지각을 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출근하겠다고. 그녀는 그날로 똑같은 흰색 셔츠와 검정 바지 15벌을 사고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셔츠 목에는 검정 가죽끈 리본을 매 악센트를 줬다. 일종의 셀프유니폼이다. 옷을 고르고 입는 데 40초면 충분했다. 

그녀는 처음에 비판과 편견에 시달렸다. 종교적 신념이냐, 반항이냐는 둥 이상한 여자로 취급받았다고 한다. 그 후 회사는 그녀의 옷과 삶에 대한 철학을 이해하고 공유한다는 의미로 1년에 한 번 전 직원이 그녀처럼 입고 출근하는 날을 정했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매일 같은 옷을 입기로 한 결정을 승인받는 데는 결국 남성의 권위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최근 국내 발간된 미국의 진보적 사회비평가 나오미 울프의 책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에서 이런 용어를 처음 봤다. 
일을 하는 현대 여성은 남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PBQ(Professional Beauty Qualification)를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직업에 필요한 아름다움의 자격 조건’이다. 이것이 여성에 대한 고용차별과 유리천장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흥미로운 이론을 제기한다. 산업혁명 이후 집안일만 담당하던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남성들이 자리를 잃을 위험에 처하자, 아름다움의 신화를 만들어 여성에 대한 고용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여성이 그 조건을 충족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해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방해한다는 것이다. 나이와 체중은 성공한 남성에게는 훈장이지만, 성공한 여성에게는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성형수술과 다이어트의 필요를 느끼게 하는 현실이라고 했다. 

저자는 아름다움이란 결국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무기’이며, 아름다움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사안이라고 결론지었다. 

남자들은 여성 동료나 여자 친구의 의상이나 그 변화에 늘 예민하다. 의미를 읽어내려 하거나 부여하려 하거나 아무튼 말이 많다. 여직원에게만 엄격한 드레스 코드를 요구하는 회사도 있다.
 
오늘도 일하는 여성은 출근길에 옷장 앞에서, 화장대 앞에서 고민한다. 바꿔 입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짙게 칠해야 하나, 엷게 발라야 하나. 내일도 그럴 것이다. 결정피로는 쌓이고 쌓인다. 성공한 여성의 헤어롤은 용서가 되고 미담이 돼도, 신입사원의 헤어롤은 칠칠맞지 못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한기봉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hkb821072@naver.com)

필자 약력 : 전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전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전 한국온라인신문협회장, 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한기봉  love@lovesbeaut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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