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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시크는 패션이 아니다
▲ 카트린느 드뇌브(좌), 줄리엣 비노쉬

프랑스 여배우들은 오랜 세월 나의 로망이었다. 나의 청춘 첫 뮤즈는 카트린느 드뇌브(74)였다. 데뷔작인 ‘쉘부르의 우산’(1964)에서 노란 레인 코트에 색색의 파스텔톤 우산을 받쳐 든 금발의 여인. 청순이란 단어에 설명이 필요 없는 주느비에브는 나에겐 영원한 ‘빗속의 여인’으로 남아있다. ‘세브린느’(1967)에서는 차갑고 무표정한, 우아하지만 도발적인 기품으로 나를 서늘케 했다. 샤넬 No.5가 가장 어울리는 프랑스 배우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녀는 엘레강스(우아) 그 자체다.

그녀 다음으로 나를 홀린 여자는 가장 프랑스적인 배우 줄리엣 비노쉬(53)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며 더 고혹적이고 매력적이다. ‘퐁네프의 연인들’ ‘잉글리시 페이션트’ ‘블루’ ‘대미지’ ‘초콜릿’…어느 영화에서나 그녀는 그녀만의 분위기를 내뿜거나 만들어낸다. 압도적인 지성미와 기품을 갖추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사회참여와 자유분방한 연애도 유명하다. 그녀를 규정하는 다양한 이미지 중 최고는 단연코 ‘기품’이다. 기품이란 ‘우아하고 고상한 품격’이다. 

그녀는 30대 시절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여성은 40세가 되어야 비로소 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나는 도저히 못 기다리겠어요.”

비노쉬와 비슷한 느낌의 배우가 있다. 영국 태생이지만 프랑스에서 데뷔하고 프랑스 배우로 통하는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57). 비노쉬의 지적 분위기와는 또 다르다. 비노쉬가 무심한 듯 지적이라면 그녀는 도도하고 차갑고 깊게 지적 분위기를 발산한다. 

나의 프랑스 여배우 계보는 이어진다. 제인 버킨과 세르지 갱스부르의 딸로 깡마르고 부스스한 샤를로트 갱스부르(46), 21세기의 뮤즈 마리옹 코티아르(42), 국민요정 오드리 토투(39), ‘몽상가들’의 에바그린 (37), 무덤덤한 프랑스의 신성 레아 세이두(32)가 다양한 색깔의 이미지로 나를 설레게 했다. 

어디 이들뿐인가. 한참 위로는 잔느 모로와 브리지트 바르도에서부터 이사벨 위페르, 이자벨 아자니, 소피 마르소, 이렌느 야곱, 엠마누엘 베아르, 모니카 벨루치(이탈리아 태생), 줄리 델피까지 한 명 한 명이 각각의 별이다.  

프랑스 여배우는 할리우드 여배우와 다른 느낌을 준다. 화려하고 분방하고 활달한 할리우드 배우들과는 분명히 다른 분위기가 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하고 사랑스럽고 품격 있고 신비하다. 서늘한 느낌마저 있다.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섹시하다면 프랑스 여배우들은 관능적이다. 전자에게 마릴린 몬로의 이미지가 겹친다면 후자에겐 카트린느 드뇌브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할리우드 영화와 프랑스 영화의 잔상이 다르듯이.

프랑스 여인은 왜 멋질까, 아니면 멋져 보일까. 바로 그 이야기다. 

‘프렌치(french)’가 들어간 만국 공통어가 몇 개 있다. 대표적인 게 프렌치 프라이, 프렌치 키스, 프렌치 시크다. 프렌치 프라이는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이 프랑스에서 기름에 튀긴 감자를 처음 접하고는 그 맛에 반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프랑스어로는 그냥 ‘기름에 튀긴’이란 뜻의 ‘프리트(frite)’라고 한다. 프렌치 프라이가 전 세계에 퍼진 건 사실 미국의 맥도날드와 버거킹의 덕이다.

프렌치 키스는 혀를 나누는 딥 키스다. 미국 사람들이 프랑스인들이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그리 불렀다는 설이 있다. 불어로는 키스를 ‘베제(baiser)’라고 하는데 영어와 달리 섹스도 의미한다. 프랑스의 낭만파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는 키스를 이렇게 찬미했다. “세상에서 유일하고 진정한 언어는 키스뿐이다.”

다음으로 프렌치 시크(chic). 바로 프랑스 여배우와 프랑스 여인의 멋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다. ‘시크’란 단어는 다국적 어원을 가졌는데 영어도 프랑스어도 다 시크다. 시크의 사전적 풀이는 ‘멋지고 세련된’이다.

그런데 시크에 프렌치가 붙으면 의미가 좀 달라진다. 프렌치 시크는 주로 패션이나 라이프 스타일에서 쓰는 말이다. 멋지고 세련됐지만 그 느낌이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에서 우러나올 때 프렌치 시크라고 한다. 멋을 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멋있고, 무심한 듯 멋있는 것이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 스타일이 있는 것이다. 프렌치 시크를 ‘에포트리스 시크(effortless chic)’라고도 한다. 멋을 내려고 노력하지 않은 멋이다.  

프렌치 시크의 이미지는 대체로 절제와 단순, 부드러운 조화, 차분함 속의 고상함, 성숙한 지성미, 도회적 세련과 우울이다. 그래서 프렌치 시크의 색깔은 튀지 않는 저채도 저명도의 중간 색조다. 도시의 무채색 계열이나 파스텔 톤이다. 감청색, 암회색, 암적색, 가지색, 진보라색, 카키색 같은 거다. 이런 색상을 내추럴하게 믹스매치한다. 그리고 선글라스나 스카프, 벨트, 장신구 같은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준다.  

프렌치 시크한 프랑스 여인들은 우아하게 늙는다. 젊은 파리지엔느가 사랑스럽다면 중년의 프랑스 여인들은 왠지 여유 있고 우아하다. 내가 프랑스 특파원으로 일할 때 동네 카페에서 혼자 에스프레소를 시켜 놓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는 중년 여성이나 할머니를 많이 봤다. 그들은 눈을 마주치면 상냥하게 미소를 띠며 인사한다. 우아함은 그 표정과 실루엣에서 나온다.

루이비통 계열사 CEO 출신인 미레유 길리아노가 쓴 책 중에 ‘프랑스 여자는 늙지 않는다’와 ‘프랑스 여자는 살찌지 않는다’라는 책이 있다. 국내에서도 출간됐다. 작가는 프랑스 여성이 우아하게 나이 드는 비결은 ‘애티튜드(attitude)’에 있다고 말했다. 삶에 대한 태도다. 유행을 좇지 않고 내면의 스타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꾸준히 가꿔가는 마음가짐이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파리지엔느는 남자를 위해 미니스커트를 입지 않는다’는 제목의 책도 있었다.

프랑스 여인들은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떤 조사에 보면 프랑스 사람들이 노화를 가장 적게 걱정하는 국민이라고 한다. 여든은 되어야 늙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두려운 건 노화가 아니라 매력을 잃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치열한 안티 에이징보다는 우아한 웰 에이징을 택한다. 
프렌치 시크는 결국 패션이 아니라 애티튜드다. 어느 책에선가 글에선가 읽었다. “프랑스 여자는 늙지 않는다. 다만 클래식해질 뿐이다.” 

한기봉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hkb821072@naver.com)

필자 약력 : 전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전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전 한국온라인신문협회장, 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한기봉  love@lovesbeaut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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