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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봉 칼럼] 인연은 체온이요, 정은 아날로그다
러브즈뷰티 | 승인 2016.12.23 16:21

한기봉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hkb821072@naver.com

‘인연’이란 제목으로 잘 알려진 두 책이 있다. 수필집이다. 두 분 다 고인이 됐지만 피천득 선생과 최인호 작가다. 두 책에서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피천득)

“우리 모두는 밤하늘에 떠있는 별이다. 이 별들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며 소멸하는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이 신의 섭리를 우리는 ‘인연’이라 부른다. 이 인연이 소중한 것은 반짝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의 빛을 받고 너는 나의 빛을 받아서 되쏠 수 있을 때 별들은 비로소 반짝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최인호)

살아가는 동안 인연은 매일 일어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다. 하지만 스쳤다고 다 인연이 되는 건 아니다. 그 인연을 육감적으로 느껴서 살려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피천득 선생은 평생 아사코와의 세 번의 만남을 통해 인연에 대해 담담하게 말했다. 최인호 작가에게는 인연이란 섭리 같은 것이며 ‘서로’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이다.
 
혜민 스님은 인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본인이 좋아서 노력하는데도 자꾸 힘들다고 느껴지면 인연이 아니에요. 될 인연은 그렇게 힘들게 몸부림치지 않아도 이루어집니다. 너무 힘들게 하는 인연은 그냥 놓아주세요. 내가 별로라는 사람에게 집착해서 어떻게든 그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보겠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놓아주세요. 그러면 또 다른 인연이 어느 순간 만들어집니다.” 

사전적 풀이로 인연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사람이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다. 불교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내적·직접적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외적·간접적인 원인을 연(緣)이라 한다. 두 개가 다 잘 어울려야 인연이다. 

4연이 있다고 한다. 인연, 악연, 우연, 필연이다. 물론 뒤의 두 개는 ‘그러할 연(然)’ 자를 쓴다. 우연이 인연이 될 수 있고, 필연이 악연이 될 수도 있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연(緣)은 혈연, 학연, 지연이다. 혈연이야 어쩔 수 없지만 다른 두 개는 사회적 측면이 강하다.

인연을 생각나게 하는 세모다. 도움을 받았으나 감사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바삐 사느라 소홀했던 지인, 친구, 친척에게 우리는 연말연시 안부와 인사를 전하며 인연을 챙긴다. 

성탄을 전후해 새해 며칠까지는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댈 것이다. “올 한해 보살펴 드린 후의에 감사드리며…다가오는 새해에는…하길 기원합니다.” 대부분 의례적이고 천편일률적인 문장이다. 휴대폰의 진화 덕분이다. 무제한 문자 메시지가 사실상 공짜이고, 클릭 한 번으로 글을 복사해 붙일 수 있고, 그룹으로 분류해 놓고 동시다발로 같은 글을 보낼 수 있다. 문자를 발송하는 서비스를 해주는 업체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인사를 받았어도 내 휴대폰에 저장되지 않은 사람도 있고 기억이 안 나는 사람도 있다. 맨 앞에 내 이름 석 자라도 제대로 써준 사람은 그나마 시간을 투자했으니 성의가 있어 보인다. 문자나 모바일 메신저로 새해 인사를 받으면 이 사람 휴대폰에 아직 내 번호가 남아있구나, 라는 정도의 생각만 들지 반가움이나 감흥을 느낄 수 없다.

아마도 비슷한 생각일 텐데도 여전히 참 꾸준히들 보낸다.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심리도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진작 휴대폰으로 연말연시 인사를 하는 걸 포기한 지 오래다. 어머니와 형제에게만 손글씨로 써서 연하장이나 카드를 보내는데 우표 사기나 우체통 찾기도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느끼는 문화의 차이 중 하나가 바로 연하장 풍속이라고 한다. 작년에 일본 우정국이 발행한 연하장은 약 30억 장이었다. 인구 평균으로 쳐도 1인당 적어도 25장 이상의 연하장을 쓰는 셈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들은 보통 100장 이상 직접 손글씨로 연하장을 쓴다고 한다. 연하장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책들도 많은데 가족사진을 편집해 넣어 인쇄하거나 자녀의 성장 모습을 앨범 형태로 만들어 보내기도 한다. 연하장을 받았으면 꼭 답장 연하장을 보내야 하는 게 일본 문화다. 일본 우정국은 연하장에 일련번호를 넣어 1월에 추첨해 경품을 증정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연하장 발매 수가 궁금해 찾아봤다. 우정사업본부가 발행한 연하장은 한 해 약 600만 장 정도라고 한다. 그것도 큰 기업들이 대다수 사간다. 10년 전에 비해 거의 10분의 1 수준이라고 한다. 

휴대폰이 대중화하기 시작했을 때 기다림과 그리움이 사라졌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국내에 휴대폰이 처음 시판된 게 1989년이니 지금의 40대 이상은 약속 시간에 가슴 두근거리며 다방의 문 여는 소리만을 목 놓아 기다리다 쓸쓸히 돌아서던 청춘의 애잔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편지와 집 전화 밖에 연락수단이 없었으니 사연을 모른 채 헤어진 안타깝고 슬픈 인연도 많았다.

개인적인 연락 수단이 있었다면 영화 ‘애수’의 비극적인 운명의 엇갈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우리의 아름다운 비비안 리는 워털루 브리지에서 홀연히 몸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기다림의 추억이라면 그리움은 공간의 추억이다. 메신저와 화상통화가 그 공간을 앗아갔다. 상대가 지구촌 어느 구석에 있든, 숨어있든, 소재 파악과 소통이 가능해졌다.

▲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사진=응답하라 1988 캡처)

그리움과 기다림은 디지털이 앗아간 영원한 아날로그다. 디지털에는 두근거리는 가슴이 없다. 전해지는 체온이 없다. 지난해 나도 ‘응팔앓이’ 였다. ‘응답하라 1988’에는 주옥같은 대사가 많았다. 

“말에는 가슴이 담긴다. 그리하여 말 한마디에도 체온이 있는 법이다. 이 냉랭한 세상이 그나마 살 만하도록 삶의 체온을 유지시켜 주는 건 잘난 명언도, 유식한 촌철살인도 아닌 바로 당신의 투박한 체온이 담긴 따뜻한 말 한마디다.”

드라마 마지막 회에서 아버지 성동일은 하객이 떠난 텅 빈 예식장에 혼자 앉아있다. 그리고 까칠했던 큰딸 보라가 남긴 손편지를 혼자 몰래 꺼내 읽으며 오열한다.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그게 디지털이었다면 그런 감동이 있었을까.

이 드라마 한 편이 모바일 시대의 사람을 위안하고 눈물샘을 자극한 건 바로 쌍문동 골목 안의 아날로그 정서다. 그건 풍요롭진 않았어도 소중하고 따스했던 가족과 이웃, 친구 사이의 36.5도 체온이다. 사람 사이의 정은 결국 지지고 볶고 부딪치는 체온이다.

연말이 되면 아파트 편지함을 기웃거리게 된다. 멋진 필체가 아니더라도 체온과 정성이 느껴지는 카드와 연하장을 받고 싶다. 그런 사람이 나의 인연일 것이다. 손편지를 주고받는 인연이 오래 갈 인연이다. 내 인연의 서랍 속에 모바일 메신저는 없다. 그건 그냥 건조한 문자일 뿐이다. 그건 말과 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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