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오피니언
[한기봉 칼럼] ‘파워 런치’와 ‘소프트 디너’
러브즈뷰티 | 승인 2016.11.01 14:08

한기봉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hkb821072@naver.com

기자 친구와 공무원 후배, 그리고 나 세 명이 얼마 전에 점심을 먹었다. 식탁의 화제는 단연 김영란법이었다. 원래는 후배가 승진 인사로 저녁식사와 술을 사기로 한 약속이었다. 친구 사정으로 연기가 됐는데 공교롭게 김영란법이 발효된 며칠 후로 날이 잡혔다.
 
후배가 고민을 말했다. 세 명 모두 김영란법 적용 대상이고 업무 관련성도 있는데 저녁 먹고 선술집에 간다 해도 1인당 3만 원 이상은 나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를 따라다닐 파라치도 없을 텐데 신경 쓰지 말고 예정대로 저녁에 보자고 말하려다 왠지 찜찜했다. 결국 우리는 1인당 1만 2천 원짜리 생선초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그것도 각자 계산하고 아쉽게 헤어졌다.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며 10년을 이어온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다. 김영란법에 적용되는 사람이 절반 정도다. 며칠 전 총무로부터 연락이 왔다. 여러 해석과 의견이 분분했지만 일단은 점심에 모이는 걸로 바꾸겠다고 한다. 학연을 핑계 삼아 편하게 소주 한 잔 할 수 있는 10년 전통이 무너져 좀 섭섭하긴 했는데, 아내는 영란 언니가 너무 고맙다며 좋아했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 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생각보다 큰 혼란은 없는 모양이다. 언론은 일제히 달라진 풍속도를 소개했다. 주로 저녁 풍경 이야기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술과 관련한 편의점 매출 변화였다. 씨유(CU)의 경우 청탁금지법이 발효된 9월 28일 이후 10월 21일까지 냉장 안주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7.1%나 크게 늘었다. 술 판매액도 주종을 막론하고 20~30%나 많이 팔렸다. 반면 숙취 해소 음료 매출 증가율은 종전 20%에서 9.7%로 반토막이 났다. ‘혼술 시대’를 예고한 변화다.

실제로 신한카드사가 김영란법 시행 전후 법인카드 이용 행태를 분석했는데 요식·유흥·골프 업종에서 매출과 이용 건수가 5~10퍼센트 줄었다. 신용카드 결제 시간도 한 시간 가량 앞당겨졌고 무엇보다 더치페이가 확연히 많아졌다. 택시업계는 오후 7시대 이용객이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물론 한정식 식당이나 고깃집, 백화점 레스토랑, 화훼농가의 수입은 예상대로 많이 줄었다. 신용카드사들은 앞으로 저녁 시간대 가족 외식과 쇼핑 소비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달라진 풍속도 기사를 읽어보다가 ‘파워 런치(power lunch)’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됐다. 업무상 미팅이나 사교 성격을 겸한 점심을 미국에서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미국에선 식사 접대비가 20~25달러로 엄격하게 제한돼 접대나 모임이 대부분 점심 때 이뤄진다. 파워 런치는 정재계 인사나 금융, 법률, 언론계 같은 전문직 엘리트 사이에서 주로 이뤄지는데 비즈니스를 넘어서 정보 교환과 사교의 장으로 확장됐다고 한다. 

파워 런치가 미국에 정착하게 된 건 그들의 실용적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저녁은 가족과 함께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 때문이다. 미국은 저녁 약속을 잡아도 부부가 함께 하는 모임이 많다. 저녁을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한다는 것은 가족을 무시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만 유독 접대나 모임이 저녁에, 밤에 이뤄질까. 우선 접대란 은밀해야 하고 술과 그 이상의 향응이 따라오니 해가 떨어진 후가 좋을 것이다. 돈과 권력을 매개로 한 비즈니스는 어둡고 음습한 곳을 좋아한다. 우리나라 직장의 점심시간이 외국에 비해 크게 짧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점심을 먹는 게 아니라 거의 때우는 수준이니까.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서양과 다른 가족문화다. 가장인 남편은 무탈하게 돈을 벌어와야 하니 가정보다는 우선 직장에 충실해야 한다. 가족은 그런 가장의 모습을 당연하게, 때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으로 여기고 아내는 그렇게 충실히 내조를 한다. 꼬박꼬박 일찍 집에 들어가려고 눈치를 보고 회식에서 시계를 들여다보는 건 쪼잔한 남성으로 통한다. 남자는 좀 늦게 들어가야 권위가 서는 분위기가 있다.

혈연 학연 지연이 촘촘히 얽힌 한국 사회 특유의 인맥중시도 한 몫 한다. 인맥관리를 잘 해야만 입신양명하는 데 도움이 되니 자주 만나서 밥 한 끼 술 한 잔 같이 해야 하고 친목회도 만들어 정기적으로 모여야 한다. 대체로 친밀감이나 연대감의 정도에 따라 점심이냐 저녁이냐가결정된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도 일찍 귀가해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주로 여자의 몫이다. 여성의 사회진출과 취업이 늘면서 가사분담을 하는 남성들도 많아지고 있지만 직장문화는 아직도 남성적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정과 가족이 설 자리는 좁아진다. 그런데 김영란법이 우리 사회에도 파워 런치가 정착할 가능성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조찬 모임인 ‘파워 브렉퍼스트’ 이야기도 나온다. 저녁 식사와 이어지는 술자리로 인맥을 다지고 비즈니스를 하던 한국의 밤문화에 서서히 불이 꺼지고 있다는 신호일까. 그럼 그 불이 안방으로 옮겨올 수 있을까. 사교와 비즈니스는 파워 런치로 대신하고, 가족과는 단란한 저녁, ‘소프트 디너’를 즐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대세로 자리 잡을까. 

청탁금지법이 그 본연의 목적인 청탁과 뇌물 방지 외에 부수적 효과로 ‘저녁이 있는 삶’을 서서히 우리에게 돌려준다면 무엇보다 값진 선물이 될 것이다. 너무 오랜 세월 우리들은 대문 밖에 있었다. 울타리 안의 행복을 알면서도 그 울타리가 넘어지는 걸 막기 위해 울타리 밖에서만 너무 아등바등 애썼다.    

사실 그 모든 게 결국은 가족 때문이 아니었던가. 
“결국 가족이다. 영웅 아니라 영웅 할배라도 마지막 순간 돌아갈 제 자리는 결국 가족이다. 대문 밖 세상에서의 상처도 저마다 삶에 패어있는 흉터도, 심지어 가족이 안겨줄 설움조차도 보듬어줄 마지막 내 편은 결국 가족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필자 약력 : 전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전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전 한국온라인신문협회장, 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러브즈뷰티  love@lovesbeauty.co.kr

<저작권자 © 러브즈뷰티,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러브즈뷰티의 다른기사 보기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제휴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청소년보호정책
주소 :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 6가 348-3 수빌딩 202호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서울 아01900
등록일자 : 2011. 12. 22  |  회장 : 남궁 헌  |  대표 : 심재서  |  발행인/편집인 : 이화연
전화 : 02)701-9300  |  팩스 : 02)701-930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재율
Copyright © 2017 러브즈뷰티.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